12. 재야사학자 석간기부영(錫幹奇浮永)
미륵사지 앞에 여러 음식점이 즐비하게 늘어져 있었다. 그 음식점 중 보리밥과 무밥을 파는 곳이 있었는데 그 집 창가 의자에 50은 족히 보이는 늙수그레한 한사나이가 작은 수첩을 꺼내 무엇인가를 열심히 적고 있었다.
“이쪽에서 보면 분명 석간지주 옆에 무엇인가 집히는 것이 있어야 하는데, 분명 무왕이 이곳에 미륵사를 세울 때는 마고대성(麻姑大城)을 염두에 두고 지은 것이 분명해 이제 천년의 세월이 흘러 후천미륵이 도래 하는 시대가 되었으니 분명 마고의 세계의 문이 이곳에 있어야 하는데..”
그의 수첩에는 역 삼각형 모양이 미륵사 동탑과 서 탑 그리고 단간 지주를 중심으로 그어져 있었다. 그는 삼기면에서 농사를 짓는 농사꾼이다. 그런 그가 일주일에 한번 꼭 이곳에 들려 꼭 이 자리에 앉아 미륵사지터를 바라보며 두어 시간씩 무엇인가를 적고 가고는 했다. 이 음식점 여주인은 그런 그를 선생님이라고 불렀다. 겉으로 보기에는 꾀죄죄하니 영락없는 농사꾼이지만 왠지 날카로운 눈매며 우수에 젖은 모습은 학자타입이어서 함부로 대하기 어려웠다.
“선생님! 오늘도 뭔가 잘 안 풀리시는 모양 이예요? 식사 식겠어요! 우선 드시고 하세요!”
상냥한 목소리가 그의 생각을 깨웠다. 언제보아도 참 기품 있는 모습이었다. 예전에 이곳은 커피와 차를 파는 카페이었다. 그때부터 단골이었으니 쾌 안면이 쌓여 이제 서로 안부를 묻는 정도가 되었다. 식탁에는 보기에도 먹음직스러운 무밥이 김을 모락모락 피우고 있었다. 여러 가지 나물들이 한상 그득하였다. 석간(錫幹) 기부영(奇浮永)은 여주인을 올려다보며
“ 아유! 오늘도 참 맛깔 나는 찬이네! 언제와도 여사님의 음식솜씨는 식욕을 자극합니다. 그려! 하하하”
그가 얼른 수첩을 주머니에 넣고 젓가락을 들어 여러 나물을 그릇에 넣고 고추장과 참기름을 넣어 썩썩 무밥을 비볐다. 그리고 먹음직스럽게 한입 숟가락으로 떠서 입에 넣고 우물거렸다.
“아! 역시 이 맛이야! 내가 그리는 순순한 어머니의 손맛이야! 여사님은 최고의 명장이야! 음!”
그의 너스레에 공연히 계면쩍어진 여주인이 곱게 웃으며
“선생님도 참! 언제나 그 소리세요! 사람 부끄럽게,”
하면서 부엌으로 들어갔다. 그 뒤태를 흐뭇하게 실눈을 뜨고 바라보며 기부영은 백제의 여인들을 떠 올렸다. 그는 언제나 백제인 이었다. 아니 백제인 으로 살기를 원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숨어있는 사학자였다. 백제는 훌륭한 나라이었다. 아니 천손(天孫)의 나라이었다. 역사는 늘 고구려인을 천손의 자손이라고 한다. 그것은 잘못된 일이었다. 부여 인이 원래 천손의 자손이다. 그것이 와전된 것은 신라에 의해서 이다. 신라와 백제는 견원지간 (犬猿之間)이었다. 통일 신라 이전에 신라는 늘 백제에게 점령당한 슬픈 역사를 가지고 있었다.
그것을 무열왕 김춘추와 김유신 등이 당의 세력을 입고 백제를 멸망시킨 뒤 고구려까지 멸망시켜 삼국을 통일한 것이다. 그이후로 백제는 맥이 끊어졌다. 견훤이 일어나 후백제를 세웠지만 그도 잠시였다. 잃어버린 역사 백제를 찾기 위해 그는 수많은 책들과 씨름을 했다. 책을 파고들수록 그는 백제에 빠져 들었다. 백제의 수도는 부여이다. 그런데 그가 주목하는 것은 무왕이 천도 하려는 이곳 익산이다.
무왕은 참으로 특이한 이력을 가진 왕이었다. 서출도 태어나 천한 상민으로 살다가 신라 선화공주를 부인으로 맞아들여 왕위에 오른 사람이었다. 그 당시 관례를 모두 타파하고 더구나 적국의 공주까지 황후로 받아드린 왕. 그가 동양 최대의 가람을 이곳 익산에 세우려 했을 때는 분명 원대한 꿈이 있었을 것이다. 그 꿈이 무엇인가? 그것을 세상에 밝히는 일을 하고 싶은 것이 기부영의 최대의 바람이었다.
“무왕은 천년왕국을 이곳에 건설하고 싶었던 것이야! 고구려에 빼앗긴 천손의 자손이란 지위를 되찾고 세계로 뻗어나갈 마고의 신세계를 꿈꾸었던 것이야! 백제는 물의 나라야! 서해를 통해 지중해까지 모든 세계를 통합하는 마고의 세계를 꿈꾸었던 것이야! 그 염력의 발상지로 이곳에 천년가람 미륵사를 지은 것이야! 영혼(靈魂)을 장악(掌握)하는 자가 육체를 움직일 수 있는 법이니까?”
기부영은 주인장이 건네준 커피를 맛있게 음미하며 다시 한 번 생각에 빠졌다. 최대의 가람을 짓는 일은 보통일이 아니다. 모든 것을 살펴보고 결정해야 하는 일이다. 단순히 연못에서 삼존미륵불이 나타나 선화공주가 이곳에 절을 지어달라고 부탁했다고 해서 천년백제를 꿈꾸던 무왕이 이곳에 천도를 결정하고 그렇게 큰 절을 지으려고 할 일은 너무 소모적인 일이다. 풍수 지리적으로 미륵산(용화산)은 아무리 살펴봐도 그저 평범한 산일뿐이다. 살아 움직이는 혈과 명당을 가지지 못했다. 대사찰(大寺刹)의 조건은 대웅전(大雄殿) 뒤편에 자리 잡은 주봉(主峰)이 웅장하고 그 기세가 마치 용이 꿈틀거리듯이 그 지기(地氣)가 강력해야 한다. 그런데 미륵사지 주봉(主峰)은 그 기세가 약하고 약하다. 그리고 골짜기도 그저 평탄한 평야 같은 형편이다.
해인사. 송광사. 통토사의 뒤편은 거대한 주봉이 턱 버티고 있고 좌우가 강건한 지세를 확보하고 있다. 그런데 무왕이 이곳을 대가람으로 택한 것은 백제는 물의 나라이기 때문이다. 이 미륵사지 옆으로는 큰 강이 흐르고 있어 해룡이 서해바다로 가는데 큰 힘을 보태주는 곳이었다. 해룡은 잠룡(潛龍)이다. 그 잠룡을 깨우는 일이 기부영이가 할 일이다. 무왕은 잠룡을 깨우지 못했다. 잠룡은 아직도 땅속에서 잠자고 있다. 천년왕국의 백제는 아직도 끝나지 않고 있다.
다만 안타까운 일은 눈앞에 이익을 위해 석산업자(石山業者)들이 석재를 파내어 파는 것으로 잠룡의 날개를 잘라먹는 일이었다. 낭산 일대의 채석장을 지날 때마다 기부영은 잠룡의 고통에 찬 울음소리를 들었다. 산은 살아있다. 일제가 혈맥을 찾아 쇠말뚝을 박듯이 어리석은 후손들이 자기의 사리사욕을 위해 조상의 혼을 갉아먹고 있는 것이다. 신라가 통일하고 백제의 혼을 말살시켜 버렸다. 백제는 신라의 철천지원수 같은 나라이었다. 백제의 역사는 없다. 그 존재가치조차도 희미하다. 삼국사기에도 백제의 역사는 불분명하다. 오히려 일본 쪽의 역사에서 백제는 살아있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특히 무왕과 그의 아들 의자왕의 치세는 잘 알려지지 안했다. 재임기간동안 오로지 신라와의 전쟁에만 몰두한 무왕 . 그리고 의자왕은 어머니의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신라를 괴롭혔다. 그것이 무열왕과 김유신장군의 미움을 사서 결국 역사마저도 잃어버린 불행한 나라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것을 생각하면 기부영은 입맛이 쓰고 찝찝했다.
“으음! 어리석은 욕심이 천년을 소비하다니? 쯧 쯧! ”
마고여신의나라(麻姑女神國)
